삼류에게 보내는 嘲笑
삼류에게 보내는 嘲笑
  • 김포데일리
  • 승인 2006.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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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보면 늘 안타까운 것이 있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어찌해야할지 모르지만 지나고 나서 바라다보면 그게 어디가 잘못되고 내 능력이 어디가 부족했는지가 훤히 보이게 된다.

때로는 과거의 일처리능력이 조잡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경우도 있어 지나쳐온 나의 무식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모든 사람들은 일류(一流)가 아니지만 일류가 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최고 일류를 꿈꾸며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일류는 경쟁력 있고 현실적인 삶에서 실용적이다.

반면 삼류는 흔히들 그 모양새가 일류를 흉내 내지만 그 결과물이나 그 모양새가 일류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최고의 선에 대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 최고의 선(善)은 우리에게 환상을 가졌다 준다.

삼류는 현란하다.
실력이 없는 것을 본인이 잘 안다. 하지만 아류(亞流)에서 삼류가 되기까지 그의 비장의 무기는 언어의 현란한 초식이다. 우리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생각을 기대한다. 그는 그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그 현란함을 자랑하고 싶고 또, 시도하려한다.

하지만 그 현란함은 결국 소잡는 식칼로 메뚜기에게 겁을 주듯 막가자는 것이냐고 윽박지르고 끝을 낸다.

결국, 그 현란함은 실력 없음을 보여주게 된다.

대학시절 소위 소장학자라는 교수들은 의욕이 있는듯했지만 그저 한 시간 내내 칠판에 써대는 영어, 한문으로 학생들 기만 죽이지 뭐 하나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없었다.

 후일 그 분을 만나보니 사실 그때는 그도 그 이론을 잘 몰랐다고 한다.   그도 모르고 학생도 모르고 보낸 그 한 시간의 어리둥절한 진지함은 무엇인가. 그게 삼류의 표본이다. 삼류의 진지함은 늘 어리둥절하게 한다.

삼류는 신념이 없다.
다만 신념이 있는 척만 할 뿐이다. 내가 지역의 최고 '인태리'라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그 신념과 자신감은 오만일 뿐이다.

삼류는 배려할 줄 모른다.
삼류는 시야가 좁아서 남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남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관성에만 충실할 뿐이다.  배려할 줄 모르는 것보다 배려할 그런 존재의 만족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다.

능선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적이 없는 삼류는 전체를 본 적도 없다. 전체를 아우르고 통일시키려는 욕심이나 목표의식이 없다.
삼류는 아첨을 좋아한다.

삼류는 자신이 없다. 따라서 자꾸 자신에게나 남들에게 자신이 일류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 버릇이 심해지면 면전에서 비례가 될 정도의 아첨을 들어도 얼굴에 철판을 깐다.

삼류는 기본이 약하고 호흡이 짧고 편식을 좋아한다.
한마디로 실력이 없다. 기본기가 약해 응용력이 떨어지고 상황판단 분석능력 등 종합능력이 떨어진다. 그저 우왕좌왕할 뿐 침착하질 못하다.

예측할 수 없던 한 여름의 무더위도 시간 속에 잠들었다.
생각의 계절 가을의 길목에서 삼류들에게 조소를 보내고 싶다./최철호(전 경기도 학원연합회회장,  전 김포문화원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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