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
  • 이상철
  • 승인 2004.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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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날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냐며 여쭈어 본 적이있 었다.

필자가 태어나기 20년 전인 1950년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던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는 눈시울이 불거지기도 했다.

3대조 때부터 기독교 집안(족보신앙이라고 하는것도)으로써 백제시대부터 대대로 벼슬아치를 지내던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기 기독교문화에 눈뜨던 할아버지는 슈바이처라는 서양의 선교사를 존경하셔서 의사와 더블어 선교사가 되기로 어린시절 부터 결심했다고 한다.

선교활동을마치고 귀국한 외할아버지 가족은 31살 되던해 서울대 병원장을 역임하면서 당시로도 부자동네로 손꼽히던 혜화동 가정에서 집사 너댓명을 거느리고 기사를 둔 리무진(당시 리무진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리무진급이었슴)과 동대문지역 전체를소유한 땅 부잣집이었다.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늘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셨다고 회고하셨다. 하버드대학 유학생활을 거쳐 중국, 아랍국가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벌이셨다. 해방 후 귀국한 뒤 병원을 설립하시고 국내에서 의료활동을 시작 하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곧 6.25가 발발하면서 식구들은 모두 피난을 떠나려했지만 조부님께서는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데 자기들만 살겠다고 고향을 등진 대다수 의사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었다는 소식에 의사들 대부분이 서울을 떠난 직후여서 전선일대엔 의료진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8살난 딸아이(필자의 모친)의 손을 꼭 붙잡은 아내는 한강교가 폭파될 것이라며 서둘러 피난을 설득했지만 고집을 꺾진 못하였다.

'북한군들이 미아리 고개를 향해 내려오고있어요. 밖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같이 가요' 그렇지만 조부님께서는 미소를지으며 김일성과 자신은 아는사이(김일성의 부모가 모두 크리스찬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라며 저들과 상대하면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 이라며 안심시키고 장인.장모와 처남과 매형,시누이 등 자신의 가족과 부모님들만 피난케 하고 부상자들과 국군 패잔병을 돌보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그의 설교내용에 감동에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진정한 상황이었다. 동대문지역을 점령한 북한군들은 더이상 상종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이라고는 차마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린아이건 임산부건 아녀자건 닥치는대로 총검으로 난도질하고 죽은 어미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통곡하는 아이마져 처참한 시신으로 만들어버렸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외조부님은 북한산에 계신 사찰에 은신하면서(기독교인이지만 북한군들이 기독교인들만 골라 처형한다는 소식을듣고 불자로 변신하셨으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분이었는가)라디오를통해 전황을 경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워낙 활달한 성격의 외조부님은 3개월 가까운 시간을 실내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 감옥과도 같았다.

UN군이 상륙하고 의료반이 도착하고 있다는소식에 매우 기뻐하시며 때맞춰 상경하는 가족들을 맞기위해 박으로 나가다 잔류해 있던 북한군 병사들에 체포되 노동당사로 압송되셨다. 국방군들을 어디에다 숨겼냐며 모진 고문을 받은 외조부님은 마침 당사를 습격한 국군에의해 구출되셨지만 만신창이가 된 조부님몰골은 외국인 의사들조차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9월27일 그러니까 서울수복을 1일 앞두고 35세라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가지에 피범벅이 된 모습을 본 가족들은 그 자리서 실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망인이 되신 외할머님은 이후 40년동안 인천 숭인동에있는 10층빌딩 소유주로 지내다 현재 우리 식구들이 모시고 있다. 그것이 유일하게 남겨준 유산이었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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