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나라가 태평해지고,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
전 김포시청 경제국장 조성춘
개헌을 하자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뉴스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현행 헌법은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탄생한 것으로 약 40년 전의 사회상과 가치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정의나 법의 기본정신이 시대에 따라 급격하게 변화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나 2026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지향적 목표를 설정하기에 다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해방 이후 1948년 제헌헌법이 제정·공포된 이래 지금까지 9번의 개정이 있었습니다. 불과 78년 동안의 일입니다.
조선은 약 500년을 견뎌 온 나라입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되기 직전 고종에 의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새나라를 열었지만, 어쨌든 태조 이성계가 문을 연 조선은 27대 518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조선의 법령체계를 말하면 으레 《경국대전》을 맨 먼저 손꼽게 됩니다. 물론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이야말로 조선 법령체계의 최고봉이라는 데 토를 달 수는 없지만, 조선 최초의 법전으로는 태조 대의 《경제육전》(1397)이 있으며, 비록 사찬이기는 하나 정도전이 지어 태조에게 바친 《조선경국전》(1394)이 있습니다. 세종 때는 경제육전을 보완한 《경제속육전》(1433)이 만들어지고, 성종 대의 《경국대전》(1485)은 《속대전》(영조, 1746), 《대전통편》(정조, 1786)을 거쳐 《대전회통》(고종, 1865)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조선 500년의 사회 변화가 지금의 변화 속도와는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500년 동안 10번도 고치지 않을 정도로 법적 안정성이 유지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은 고려의 무장이었던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으로부터 선위받는 형식으로 새롭게 연 나라입니다. 주인공은 이성계였지만 설계자는 삼봉 정도전이었습니다.
공맹(孔孟)을 공부했지만 맹자의 생각에 심취해 있던 삼봉이 꿈꾸는 새나라는 신하의 나라였습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으며, 왕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른 왕을 세울 수 있다는 혁신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삼봉의 정신과 정치철학이 가장 잘 담겨 있는 것이 《조선경국전》의 서문 격인 '정보위(正寶位)'입니다.
총 274자의 한자로 지어진 정보위는 '임금의 보위는 오직 인(仁)으로 지킬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며, 유교적 민본주의에 기반한 군주관과 통치 정당성을 밝히는 글입니다. 이는 우리 헌법의 전문과도 같은 성격을 띱니다.
정보위에서 삼봉은 왕의 자리가 임금 개인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공적인 보배'이므로, 오직 인(仁)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유교적 왕도정치 철학을 전제합니다. 그러면서 백성은 지극히 약해 보이지만 그 어떤 무력으로도 굴복시킬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지만 결코 속일 수 없는 존재라고 역설하며 '민심을 얻어야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민본주의 정치를 최우선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나라가 태평해지고,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며 자칫하면 왕도 바꿀 수 있다는 서슬 퍼런 위협을 대놓고 던집니다. 맹자의 정치 신념인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무시무시한 경고지요.
이 외에도 삼봉은 덕치(德治)와 인(仁)의 실천, 재상중심정치(宰相中心政治)의 기틀을 다지는 것으로 귀한 임금의 보위를 바르게 할 수 있다고 주창하였습니다.
삼봉은 비록 태종 이방원에 의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설계한 조선과 통치철학은 500년 조선을 정수리로부터 꿰뚫어 끊임없이 왕권과 신권이 서로 견제하고 충돌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이 500년 만에 망한 것을 두고, 그것도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된 것을 두고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 어떤 왕조가 500년을 이어 왔는지 찾아보십시오.
개헌은 필요합니다.
다만 개헌의 초점이 단지 대통령의 임기나 권한에만 맞춰져 다른 중요한 문제가 도외시되거나, 개헌의 주체가 일부 정치권에 한정되어 제대로 된 논의와 국민적 합의가 생략된 채 마련된 초안으로 어물쩡 넘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치인이든 법학자든 누구든, 600여 년 전에 쓰여진 삼봉의 '정보위'를 한 번쯤 정독해 보고, 무엇을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2026년 오늘을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인지 고민해야겠습니다.